[bookclub 개발기] 4. 리브랜딩 - sloow book

 

이름이 필요했다

처음 MVP 기획을 정리할 때 이렇게 적었었다.

우선 app의 이름은 bookclub app 이라고 하였지만 이름은 차차 생각해보는 걸로..!

차차 생각해보다가, 어느새 코드 곳곳에 bookclub 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폴더명, 패키지명, Supabase 프로젝트명까지. 더 미루면 바꾸기 어려워질 것 같아서, 잠깐 키보드를 내려놓고 이름과 철학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sloow book

새 이름은 sloow book 이다.

slow 가 아니라 sloow. o 가 하나 더 들어간다. 빠른 세상에서 한 박자 더 느리게, 한 글자 더 머무르자는 의미를 담았다. 그리고 나란히 놓인 두 개의 oo 는 무한대 기호(∞)와 닮아있다. 느리게 읽는 시간이 결국에는 가장 멀리, 가장 오래 남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 ‘느리게’ 인가

브랜딩을 고민하면서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건 한 가지 질문이었다.

AGI 시대에, 딸깍으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건 뭘까?

요즘은 정말 딸깍 한 번이면 무엇이든 만들어진다. (이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난 딸깍이라는 단어가 너무너무너무 싫다.. 딸깍이라는 말로 누군가의 노고를 무시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코드도, 이미지도, 영상도, 심지어는 책 한 권 분량의 글도 몇 초면 나온다. 개발자로 일하면서 그 변화를 매일 가장 가까이서 보고 있다. 편리하고, 무섭고, 가끔은 허무하다.

그래서 반대편에 있는 것을 찾고 싶었다. 빠르게 만들 수 없고, 자동화할 수 없고, 결국 사람의 시간이 들어가야만 완성되는 것. 오래 고민한 끝에 도착한 답은 이었다.

마음에 콕 걸린 한 문장을 온전히 소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 한 권의 책을 읽고 곱씹는 사유의 시간. 같은 문장을 친구와 다르게 읽어내는 순간. 그건 어떤 좋은 모델도 1초 만에 만들어줄 수 없으니까.

sloow book 은 그 ‘느린 시간’ 을 위한 앱이다. 빠르게 많이 읽는 것을 돕는 앱이 아니라, 한 권을 천천히 읽고, 기록하고, 나누는 시간을 지키는 앱이다. (항상 다독보다는 정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세상에 좋은 책이 너무 많아 자꾸만 다독에 집착하는 나를 위한 앱이기도 하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이름과 철학을 정리하고 나니, 그동안 적어둔 백로그를 다시 펴게 됐다. “있으면 좋을 것 같은” 기능들이 수십 개 적혀 있었는데, 이제는 그걸 다른 잣대로 다시 본다.

이 기능은 ‘느리게 읽는 시간’ 을 더 잘 지켜주는가? 아니면 ‘빠르게 많이 읽는 것’ 을 돕는가?

후자에 가깝다면,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보류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

  • AI 자동 요약 / 한 줄 정리: 책 한 권을 30초로 압축해주는 기능. 편하지만, 곱씹는 시간을 빼앗는다.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라 입력값이 되어버린다.
  • 독서 통계 대시보드 / 연간 독서량 랭킹: 숫자로 환산하는 순간 ‘많이 읽기’ 게임이 되기 쉽다. 다독에 집착하는 나 같은 사람을 더 부추기는 방향이다.
  • 소셜 피드 / 좋아요 / 팔로워 수: 짧고 자극적인 글이 잘 보이게 만드는 구조. 며칠을 붙들고 쓴 한 문장이 묻혀버리기 쉽다.

반대로, 철학을 해치지 않으면서 더 깊게 만들어줄 수 있는 방향들도 있다.

  • 하이라이트에 시간 두기: 밑줄을 긋고 바로 코멘트를 강요하지 않는 흐름. 며칠 뒤에 다시 그 문장이 떠올랐을 때 추가로 적을 수 있게, ‘이 문장에 다시 돌아오기’ 같은 장치를 둘 수 있을까.
  • 느린 토론: 실시간 채팅이 아니라, 한 질문에 며칠씩 머무는 스레드. 답글 작성 전 24시간을 비워두는 식의 ‘의도된 지연’ 도 실험해볼 만하다.
  • 내 문장 다시 만나기: 1년 전에 내가 밑줄 그은 문장, 친구가 같은 책에서 밑줄 그은 다른 문장을 가끔 꺼내 보여주기. 알고리즘이라기보다는 편지에 가까운 형태로.
  • 책 한 권의 ‘함께 읽기’: 같은 책을 같은 페이스로 읽는 모임. 이번 주에 읽은 챕터에 대해서만 이야기 나눌 수 있게 잠금을 걸어두는 식의 약한 제약.

아직 어느 것도 확정된 기능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기준이 생긴 것만으로도, 다음 스프린트에서 무엇을 먼저 만들지 정리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그래서 누구를 위한 앱인가

여기까지 적고 나서 멈칫한 지점이 있다.

방향을 ‘느리게, 사유, 곱씹기’ 쪽으로 너무 확고하게 잡아두면, 정반대의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이 없는 앱이 되어버린다. 왓챠처럼 내가 본 영화를 기록하듯, 올해 읽은 책 47권 같은 카운트와 별점, 한 줄 평이 쌓이는 재미로 독서를 즐기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나도 그 재미를 모르는 건 아니다.

기록 + 카운트 + 랭킹 + 피드 — 이건 그 자체로 좋은 제품 카테고리고, 이미 잘 만들어진 서비스들이 있다. sloow book 이 같은 시장에서 그들과 경쟁하려고 만든 앱은 아니다.

대신 이런 사람을 위한 앱이고 싶다.

  •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해도 한 권을 오래 붙들고 있는 사람
  • 책 한 권을 다 읽지 못해도, 마음에 남은 한 문장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
  • 다른 사람의 별점보다, 같은 문장을 읽은 친구의 다른 해석이 더 궁금한 사람
  • 통계상 ‘올해 0권’ 이지만, 그 0권 안에서 사유는 쌓여가는 사람

이렇게 적고 보면 시장이 좁아 보인다. 그렇다. 좁다. 하지만 1편 에서 적었듯이 이 앱은 처음부터 수익 창출이 목표가 아니라, 나와 내 친구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정도의 수준 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굳이 모든 사람의 취향을 만족시키려고 방향을 흐릴 이유가 없다. “기록도 되고, 통계도 보여주고, 사유도 도와주는 앱” 보다는 “느리게 읽는 시간을 지켜주는 앱” 쪽이 훨씬 또렷하니까.

물론 가벼운 기록 (다 읽은 책을 책장에 꽂아두는 정도의 기능) 은 어떤 독자에게나 필요하다. ‘느림’ 을 강요하는 앱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냥 ‘느림이 환영받는’ 앱이면 좋겠다. 그 미묘한 차이를 어떻게 UI 와 디폴트 값으로 표현해낼지가 앞으로의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