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club 개발기] 5. 페르소나부터 다시

 

다시, 처음으로

이름과 철학까지 정리하고 나서, 이제 백로그를 다시 정렬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펼쳐놓고 보니 결정이 안 됐다. “느리게 읽는 시간을 지켜주는가?” 라는 잣대는 듣기엔 좋은데, 막상 개별 기능 앞에 가져다 대면 애매했다. 토론 기능은 느린가 빠른가? 공유 기능은? 통계는?

기준이 있어도 결정이 안 된다는 건, 기준이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다는 뜻이었다. 추상적인 철학을 구체적인 결정으로 끌어내리려면 중간 단계가 필요했다. 다시 진지하게 S/W Engineer 모드로 돌아가서 페르소나부터 명확하게 설정하고 넘어가기고 했다.

그래서 키보드를 다시 내려놓고, 내 주변에서 책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는 사람들을 떠올려봤다. 네 명이 나왔다.

네 명의 사람

이름은 A, B, C, D 로 부르겠다. (실제 모델이 된 사람들이 있어서 이름은 가렸다.)

A: 30대 초반 여성, 본인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공대를 졸업했지만 항상 문학에 대한 갈망이 있다. 경험이 부족한 탓 + 성향 때문에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건 서툰 편이지만, 글로 옮기는 건 좋아한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정확한 문장으로 생각을 옮기고 공유하는 걸 좋아한다. 언제든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지만, 읽고 나면 잘 정리되지 않는 느낌이 든다.

B: 30대 초반 여성

문과생, 프랑스어 전공. 평생을 자연스럽게 문학 안에서 살아왔다.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쓴다. 다만 어디에 기록하는 걸 귀찮아하고, 기록의 필요성을 딱히 느끼지 못한다. 글쓰기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다. 편지 같은 글은 잘 쓴다. 다만 경험을 밖에 쌓아두기보다 그 순간에 집중하고 머릿속에 담아두는 쪽을 더 좋아한다. 그래도 이전에는 sns도 잘 안 했는데 요즘에는 조금씩 기록을 남기려 하는 편.

C: 20대 중반 남성

웹소설을 좋아한다. 특히 무협지와 한국 SF소설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책은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어딘가에 기록하거나 정리하지는 않지만, 마음에 콕 박히는 문장이 있으면 여자친구한테 공유하는 편이다. 책을 읽을 때 온 에너지를 쓰며 한 문장 한 문장 톺아보여 읽는 편이다.

D: 30대 초반 여성

책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읽으려고 노력한다. 글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SNS 에 사진을 찍어 올리는 걸 좋아한다. 거기에 본인 생각을 짧게 덧붙여서 공유하기도 한다. 도파민이 가득한 책을 좋아한다.

한 줄로 요약하면

  • A: 읽지만 쌓이지 않는 사람. 기록의 필요는 강한데 방법을 못 찾은 사람.
  • B: 글은 잘 쓰지만 혼자 쌓는 기록의 동기가 약한 사람. 그 순간에 머무는 사람.
  • C: 같은 책을 곱씹는 사람. 공유하지만 정리하진 않는 사람.
  • D: 천천히 읽고 짧게 덧붙이는 사람. 이미 SNS 로 일부를 하고 있는 사람.

메인 페르소나는 A: 즉, 나

이건 거의 자동으로 정해졌다.

A 는 글로 생각을 옮기는 걸 좋아하지만 정리가 잘 안 된다는 구체적인 결핍이 있다. 이건 sloow book 이 정확히 풀려는 문제다. 그리고 A 는 다름아닌 나다. 사용자 인터뷰가 따로 필요 없고, 매 결정마다 “내가 이 화면에서 뭘 느낄까” 를 즉시 검증할 수 있다. 사이드 프로젝트로서 이만한 강점이 없다.

많은 좋은 앱들이 이렇게 시작했다. 만든 사람이 가장 절실한 첫 번째 사용자였던 케이스. sloow book 도 그렇게 시작하기로 했다.

서브 페르소나: C

C 는 “좋아하는 문장을 여자친구에게 공유한다” 는 행동이 있다. 그리고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다. 이 두 행동이 sloow book 의 철학과 정확히 맞닿는다. “많이 읽기보다 깊이 읽기” 의 살아있는 예시다.

다만 C 는 기록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 사람을 끌어들이려면 기록의 진입 장벽이 매우 낮아야 한다. “좋은 문장 하나만 남기면 끝” 이어야 한다. 여러 칸을 채우게 강요하면 떠난다. C 의 존재는 sloow book 의 입력 UX 에 강한 제약을 준다(단순해야 한다.)

B 와 D 는 입구를 지키는 페르소나

A 와 C 가 sloow book 의 안쪽을 채우는 사람들이라면, B 와 D 는 입구 에 있는 사람들이다. 깊은 사용자가 되기를 강요받지 않고도, 가벼운 형태로 sloow book 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사람들. 두 사람의 입구가 서로 다르다는 게 흥미롭다.

B: 가벼운 기록의 입구

처음에는 B 를 페르소나에서 빼려고 했다. 기록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한 가지 디테일을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B는 왓챠 같은 앱은 잘 쓴다. 볼 영화를 미리 등록해두고, 보고 난 후에 별점 정도는 매긴다. 책에서도 비슷한 행동을 한다.

그러니까 B 는 “기록을 안 하는 사람” 이 아니라, “가벼운 흔적은 남기는 사람” 이었다. 30초 안에 끝나는, 거의 노력 없는 기록은 한다. 그 이상의 깊은 기록을 본인이 먼저 찾아 나서지 않을 뿐이다.

B 는 sloow book 에게 세 가지를 가르쳐준다.

첫째, 최소 기록의 형태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B 가 왓챠에서 하는 행동: 볼 책 등록 + 다 본 후 별점은 가장 가벼운 기록의 원형이다. 만약 sloow book 이 이런 가벼운 트랙을 아예 제공하지 않으면, B 같은 사람은 첫 화면에서 “여기는 너무 무겁다” 며 떠난다. 그러면 sloow 는 깊이 읽고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들만의 닫힌 앱이 된다.

둘째, 깊이는 이미 안에 있고, 옮기는 트리거가 필요할 뿐이라는 것. B 는 곱씹기와 회고 자체를 안 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그걸 머릿속에서 처리하고 글로 외부화하지 않는 쪽일 뿐이다. 그렇다면 sloow book 이 B 에게 해줘야 할 일은 깊이를 주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진 깊이를 밖으로 옮기게 만드는 가벼운 트리거다. 매일 알림으로 닦달하는 식이 아니라, “이 책 다 읽었네. 한 줄만 남기고 싶지 않아?” 정도의, 강요하지 않는 신호.

셋째, 수신자가 있는 글은 B 도 쓴다는 것. B 는 일상의 기록은 안 하지만 편지는 잘 쓴다. 이게 결정적이다. B 는 글을 못 쓰는 게 아니라, 혼자 쌓는 기록의 동기가 약한 것뿐이다. 그렇다면 sloow book 안에서 기록이 누군가에게 향하는 형식으로 설계된다면, B 도 자연스럽게 깊은 글을 쓸 가능성이 있다. 책에게 보내는 편지, 미래의 나에게 부치는 메모, 이 문장을 좋아할 친구에게 적는 한 줄. 이런 형식은 “그 순간에 집중하고 머릿속에 담아두는” B 의 성향과도 충돌하지 않는다. 한 번 쓰고 보내면 끝이지, 계속 관리해야 하는 기록이 아니니까. 흥미롭게도 이건 메인 페르소나 A 의 “정확한 문장으로 생각을 옮기고 공유하는 걸 좋아한다” 와도 정확히 겹친다.

그래서 B 는 입구 페르소나로 두기로 했다. 적극적으로 끌어올 대상은 아니지만, 막지 않는 것이 설계 원칙이 되는 페르소나. 그리고 동시에, 다음 편에서 회고 기능을 설계할 때 수신자가 있는 글의 형식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는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D: 공유의 입구

D 도 처음에는 서브 페르소나로 두려고 했다. 이미 문장 + 본인 생각을 SNS 에 올리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sloow book 의 핵심 행동인 “문장 수집 + 짧은 메모” 와 같다고 봤다. 다만 D 는 그걸 대중에게 공유하는 데 비해, sloow book 은 본인 안에 쌓는 쪽에 가깝다는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D 의 자리를 다시 잡았다. D 는 sloow book 의 깊은 사용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 다만 D 가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났을 때, sloow book 이 예쁘게 꾸민 공유 카드를 만들어주는 도구 로 잠깐 들렀다 갈 수 있으면 충분하다. 러닝 앱이 끝나고 나오는 페이스 카드를 사람들이 인스타에 올리듯이, sloow book 의 문장 카드도 그렇게 쓰일 수 있다.

D 는 sloow book 의 공유 기능의 입구로 들어오는 사용자다. B 가 가벼운 기록의 입구 라면, D 는 공유의 입구다. 둘 다 깊은 곳까지 들어오지 않아도 sloow book 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고, 둘 다 막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이게 sloow book 의 공유 기능 설계에 명확한 함의를 준다. 공유 카드는 D 같은 사람이 바로 SNS 에 올리고 싶을 만큼 잘 만들어져야 한다. 인색하게 만들면 D 는 안 쓴다. 다만 그 카드의 톤이 sloow 의 정체성을 담고 있어야, D 의 친구들이 카드를 보고 “이거 어디서 만들었어?” 라고 묻게 된다. 그게 sloow book 의 자연스러운 유입 채널이 된다.

정리하면

  • 메인 페르소나: A는 모든 결정의 기준
  • 서브 페르소나: C는 느린 다독자, 진입 장벽이 낮아야 함
  • 입구 페르소나: B (가벼운 기록의 입구) + D (공유의 입구)

이렇게 좁히고 나니 다음 결정이 훨씬 쉬워졌다. 예를 들어 “친구 초대 기능 넣을까?” 라는 질문이 오면, A 와 C 중 누구에게 필요한가부터 따진다. 그리고 동시에 — “이 기능이 B 와 D 의 입구를 막고 있지는 않은가?” 도 같이 본다.

이게 또 다른 함의를 준다. sloow book 은 너무 금욕적이어서는 안 된다. 별점 같은 가벼운 평가 장치, 잘 꾸며진 공유 카드 같은 단순 기능은 있어야 한다. 다만 그게 메인이 되어선 안 된다. 가벼운 것은 뒤에 있고, 문장 수집과 회고가 앞에 있어야 한다. B 와 D 가 들어올 수 있되, A 와 C 가 머물 수 있는 구조.


다음 편부터는 이 네 명을 기준으로 개별 기능들을 하나씩 검토해볼 것이다. 토론, 공유, 회고… 각 기능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누구에게 맞지 않는지, 그리고 누구의 입구를 막지 않는지부터 따져보려고 한다. 기능을 만들기 전에 사람을 먼저 보는 순서로.